독일 베를린에 다녀왔다. 주택가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농인 디자이너 조혜미였다. 첫 만남이었다. 오래전에 농인 중에 괜찮은 디자이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메일을 통해 몇 번 작업 의뢰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얼굴도 몰랐고,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덴마크에 있는 농교육 기관인 프론트러너즈(Frontrunners)에서 프로그램을 이수하게 되었다며 수어로 영상을 찍어 올렸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석사 과정을 막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반가웠다. 체류 국가는 다르지만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농인이자 여성인 그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유럽에서의 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종종 그녀의 영상을 봤다. 그녀는 그곳에서 국제 수어를 배워, 세계 각국에서 온 농인들과 지내며 농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녀와 친구들이 올리는 수어 영상의 연출과 편집은 너무나 흥미로웠다. 청인들이 글과 사진을 올리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때, 농인들은 자신의 언어인 수어를 영상으로 촬영하여 올렸다. 핸드폰 카메라나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로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이 영상을 올리는 이유는 이렇습니다”하고 수어로 설명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프론트러너즈 학생들의 영상은 차원이 달랐다. 마치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았다. 영상이라는 시각 매체를 농인들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지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청인이 비디오를 다루는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혜미 씨가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에서 남북한 수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 갈무리.
졸업 후, 그녀는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볼 계획이라 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남한의 ‘수어’와 북한의 수어, 북한 말로 ‘수어’를 소개하는 ‘손말수어’ 프로젝트였다. 얼마 후,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한독 시민 연구 단체 코리아 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 집회 현장 영상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신기했다. 그녀가 농인 및 수어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한국의 인권 및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사실은 친구라는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의 편견일 수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농인 중에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거나 활동하는 이가 없었고, 반대로 정치·사회 분야의 시민단체, 청인중심의 시민 단체가 농인을 활동가로 고용한 사례를 본 적이 없었다. 농사회와 청사회, 한국 사회에서 두 세계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세계, 농사회와 청인 중심의 시민 단체가 어떤 접점을 만들어 내고 있던 것이다. 남한의 수어, 북한의 손말 그녀는 코리아 협의회 사무실로 나를 초대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반갑게 껴안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조우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맞죠?” “맞아요, 아마 페이스북에서 많이 봐서 그럴 거예요. 제가 유학 시작했을 때 보라 씨도 유학 시작했다는 글 보고 어쩐지 힘이 났거든요. 한국 농인인 나는 여기 덴마크에서, 한국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말)인 보라 씨는 가까운 네덜란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게 말이에요.”
나도 그랬다. 우리나라 사람, 아니, 그녀는 나와 같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어떤 한국인보다 더욱더 ‘우리나라’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나고 자란 농사회에 속한, 나의 부모와 같은 언어인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오랜만에 수어를 쓰려니 근육이 굳어 손가락이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고 단어 역시 기억나지 않았지만 반가운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독일에서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라고 했다(독일에는 그녀를 포함해 두 명의 한국 농인이 살고 있다). 혜미 씨는 이곳 코리아 협의회와 함께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말 그대로 손말·수어를 통한 남북의 연결과 이해, 화합을 목적으로 해요. 북한과 남한의 수어가 다르거든요. 북한 농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수어가 달라 소통하기 어려웠어요. 이상하잖아요. 같은 나라 사람인데 분단 이후 수어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이제는 소통할 수 없다는 게.”
그녀는 북한 농인들을 돕는 단체 ‘투게더함흥’에서 남한 수어와 북한 손말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시작했다. 남북한의 수어를 소개하는 영상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다섯 편이 만들어진 이 영상에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먼저 화자인 혜미 씨는 국제 수어로 인사를 하며 영상의 취지를 설명한다. 이후 화면분할을 통해 좌측에는 남한의 수어, 우측에는 북한의 손말이 비교되어 순서대로 제시된다. 화면 하단의 자막은 영어와 한글 문자언어, 두 가지로 제공된다. 이 짧은 영상에서 무려 다섯 개의 언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언어들 사이를 가볍게 넘나들며 소통의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농인은 자신의 수어를 기반으로 다른 수어를 빠르게 습득하는데 이는 청인이 다른 음성언어를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르다.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들 이길보라 감독이 코리아협의회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길보라
“이 프로젝트 자체가 한반도의 역사, 정치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여기 코리아 협의회와 닿게 된 거죠. 독일 농인이 대표로 있는 단체 ‘투게더함흥’과 ‘코리아 협의회’가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로 했고, 저는 두 단체에서 인턴을 하고 있어요.” 그녀는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방으로 안내했다. 코리아 협의회 대표와 직원, 다른 인턴이 있었다. 모두 한국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이었다. 보아하니 모두 수어를 잘하지 못하는 듯했다. 투게더함흥에서는 국제 수어를 통해 소통할 테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다. 혜미 씨는 노트북을 들고 왔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타이핑을 통해 대화 내용을 문자로 통역했다. 혜미 씨가 말을 하고 싶을 때는 노트북의 방향을 돌려 직접 타이핑했고, 옆에 앉은 청인이 화면의 내용을 입으로 읽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함께였다, 한국 수어와 한국 음성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나는 혜미 씨의 수어를 읽어 음성언어로 옮겼고, 다른 청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대화할 때 그걸 수어로 통역했다. 청인들이 내게 질문을 할 때는 내가 통역과 동시에 대답할 수 없으니 옆의 직원이 편하게 대화하라며 통역 역할을 바로 받아 문자로 통역했다. 우리는 한 번도 이 구성으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지만 모두 눈치껏 배려하며 '화자'와 '통역사'의 역할을 넘나들었다. 혜미 씨는 “수어 통역사로 부른 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불렀기 때문에 통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문자 통역보다는 수어 통역이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르게 맥락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낯선 외국에서, 자신의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국제 수어를 사용하는 곳도 아닌, 청인 중심의 단체에서 그녀가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해 어떻게든 격려하고 지지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며 이렇게 통역하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해와서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부족한 수어 실력을 좀 이해해달라고 웃었다. “통역해줘서 고마워요. 수어 통역이 있으니 세세한 부분까지 서로 이해할 수 있어 정말 좋네요. 저희는 혜미 씨랑 일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농인의 문화와 언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거든요. 북한에도 농인이 있고, 남한의 수어와 약간 다른 언어,손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혜미 씨는 정말 보물이에요. 얼마 전에는 저희가 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활동을 국제수어로 촬영해서 올렸는데 농인뿐만 아니라 청인들도 정말 많이 봤어요. 수어가 표정이 있으니까 그냥 글이랑 사진 올리는 것보다 혜미 씨가 이렇게 눈썹을 움직이면서 표정을 만들어내는 걸 보는 게 훨씬 생동감이 있는 거예요. 여기 사는 독일 사람들, 외국인들한테도 훨씬 더 잘 통하고요.”
대표가 혜미 씨에 대한 칭찬을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저는 수어를 하나도 몰랐는데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세상이 정말 넓어지는 기분이에요. 혜미 언니가 있으니까 농인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독일 농인이 대표로 있는 투게더함흥과 함께 회의할 때는 두 명의 통역사를 불러요. 독일 수어를 독일 음성언어로 통역하는 통역사를 통해 저희는 독일어로 회의를 하고, 독일 수어를 국제 수어로 통역하는 통역사를 통해 혜미 언니가 회의에 참여하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배워가는 것 같아요.”
혜미 씨는 아직 독일 수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며 원활한 소통을 위해 어서 독일어와 독일 수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신기한 것은 이들의 대화에서 한 번도 ‘장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그녀를 ‘장애인’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이 독일이라서, 한국과 비교하여 보다 더 많은 언어와 문화가 섞여 있는 다인종·다문화의 공간이라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들의 위치성 또한 큰 영향을 미칠 터였다. 독일 사회 내에서 주류 언어가 아닌 한국어를 사용하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경험치가 농인인 조혜미와 일한다는 것 자체를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상영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농인의 삶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싶어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코다 감독이 자신과 농인 부모의 삶을 직접 찍었다고 하는데 그걸 통해 혜미 언니가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들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거든요. 영화 상영 후에는 감독님과 혜미 언니와 함께 하는 토크 행사를 열고 싶어요. 언니가 한국 사회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영화를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 같아요." 이들은 독일 농인과 청인, 한국 농인과 청인을 비롯해 저마다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들 모두 초청하면 좋겠다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혜미 씨는 낯선 언어로 가득한 이곳에서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모어인 한국 수어는 거의 쓸 기회가 없고, 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 음성언어, 이제는 좀 능숙한 국제 수어, 아직은 서툰 영어와 독일어, 독일 수어. 낯선 언어들 사이에서 지내는 중이라 했다. 그녀는 많은 것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남한의 수어와 북한의 손말을 한국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소개하며 왜 한반도에 두 가지의 수화언어가 존재하는지 그것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독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청인과 농인이 문턱 없이 함께 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이들 역시 그녀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의 인식을 해체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또 다른 방식의 연대가 가능함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회의 내내 혜미 씨를 칭찬하고 동시에 코리아 협의회의 개방성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 찬사를 거듭했다. 수어로 ‘칭찬’은 주먹을 쥔 왼손에서 엄지만 올린 후 그걸 오른 손바닥으로 두 번 쳐올리는 것인데 엉덩이를 두드려 상대방을 높게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 수어를 혜미 씨를 향해 한 번, 직원들을 향해 또 한 번 사용했다. 그 기운으로 그녀들이 새로운 연대의 장을, 그녀들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 Sonmal-Sueo 손말-수어 프로젝트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SonmalSueo/ * 코리아협의회 https://www.koreaverband.de/ko/ 출처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3327&thread=03r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