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 보궐선거 앞두고 지상파 3사 인권위 진정
현행법에 개표방송 시 수어통역 화면 의무 규정 전무
활동가들 “개표방송은 선거의 연장, 수어통역 반드시 제공해야”

시민사회단체가 개표방송 때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은 지상파 방송국 3사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아래 장애벽허물기), 원심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8일 오후 2시, 서울시 중구 인권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작년 21대 국회의원선거 때 방송국 3사(KBS, MBC, SBS)가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아 청각장애인의 참정권을 침해했다고 규탄한 후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KBS 1TV의 작년 총선 개표방송 화면이다. 두 명의 진행자가 개표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투표율이 화면 하단에 자막과 그래픽으로 표현돼 있지만 수어통역 화면이 없다. 사진 KBS 1TV 개표방송 갈무리KBS 1TV의 작년 총선 개표방송 화면이다. 두 명의 진행자가 개표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투표율이 화면 하단에 자막과 그래픽으로 표현돼 있지만 수어통역 화면이 없다. 사진 KBS 1TV 개표방송 갈무리

- 후보자 토론회엔 있는 수어통역 화면, 개표방송엔 없는 이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개표방송을 내보내면서 수어통역 화면을 넣지 않는 게 장애인의 참정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해인 장애벽허물기 회원은 “개표방송은 선거의 연장이다. 개표방송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헌법 24조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인 참정권이 보장된다. 수어통역이 없다는 건 농인에게서 유권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표방송은 시민이 행사한 투표결과를 분석해 보여주는 방송이므로 유권자에게 중요하다. 그런데 보통 후보자 토론회에는 수어통역 화면이 들어가지만 개표방송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허술한 법에 있다. 선거방송 관련 규정이 담긴 공직선거법에 개표방송 시 장애인 편의제공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다.

공직선거법에서 자막과 수어통역 화면을 필수적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강제한 프로그램은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최하는 대담과 토론회뿐이다. 82조를 보면 ‘선거방송토론위원회는 대담·토론회를 개최하는 때에는 청각장애선거인을 위하여 자막방송 또는 한국수어통역을 하여야 한다’라고 적혀있다.

후보자 연설과 광고의 경우에는 자막과 수어통역 화면이 필수가 아니다. 70조와 72조를 보면 “한국수어 또는 자막을 방영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할 수 있다’는 문구는 방송국 의지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 외에 공직선거법 어디에도 개표방송 시 자막과 수어통역 화면을 넣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작년 총선 당시 울산남구을 선거구의 후보자 토론회 화면이다. 우측 하단에 작은 수어통역 화면이 있다. 사진 KBS 울산 후보자 토론회 갈무리작년 총선 당시 울산남구을 선거구의 후보자 토론회 화면이다. 우측 하단에 작은 수어통역 화면이 있다. 사진 KBS 울산 후보자 토론회 갈무리

나동환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변호사는 8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공직선거법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에 관한 규정은 없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와 자막에 관한 규정만 있는데 광고, 연설, 토론회의 세 가지 유형에만 한정돼 있다. 이마저도 토론회를 제외하고는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해 사실상 방송국 재량에 따라 수어와 자막이 들어갈 수도 있고 안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표방송은 방송법과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아래 고시)’에 따라 이뤄진다. 하지만 이 법들 또한 수어통역을 강제하지 않는다. 방송법 69조에는 방송사업자가 장애인에게 한국수어, 폐쇄자막, 화면해설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고시에서는 수어통역 화면이 들어간 방송의 의무제작 비율을 전체 방송의 5%로 한정하고 있다.

결국 개표방송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같은 일반 프로그램처럼, 수어통역 화면을 방송국 재량에 따라 삽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방송 3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 '농인 유권자의 권리를 보장하라. 개표방송 수어통역 미제공 지상파방송사 차별진정'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하민지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방송 3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 '농인 유권자의 권리를 보장하라. 개표방송 수어통역 미제공 지상파방송사 차별진정'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하민지
정해인 씨(중간)가 기자회견에서 수어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정해인 씨(중간)가 기자회견에서 수어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농인도 유권자, 차별 말고 참정권 보장하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과 장애인복지법에는 장애인이 참정권을 행사할 때 편의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게 권리로서 명시돼 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개표방송 시 수어통역 제공은 의무가 아니다. 개표방송에 각 후보의 이름과 정당, 지역구, 득표율 등이 자막으로 제공되고는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수어와 한글 자막은 다른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김철환 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문자만 내보내면 다 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게 선거인데 비장애인 입장에서만 개표방송을 내보내니 유권자로서 선거결과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내년에는 대통령선거도 있고 지방선거도 있는데 걱정이다”라고 지적했다.

노만호 원심회 회원은 “한글로 된 자막은 내게 외국어나 마찬가지다. 수어통역이 없으면 전문가 대담이나 정세분석 등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작년 총선 개표방송 때 출연진이 개표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수어가 아니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작년 총선 당시 KBS는 개표방송에 70억 원가량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MBC는 ‘시청자 퍼스트(first)’, SBS는 ‘오늘, 우리 손끝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유권자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걸 개표방송 전면에 내세웠다. 정해인 씨는 “이처럼 많은 예산을 쓰는 개표방송에 수어통역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수어가 모국어인 농인이 많은데, 이들도 시청자고 유권자다”라며 방송 3사의 장애인 차별적인 행태를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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