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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지난달 21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지난달 21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수적이다. 최근 질병관리본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시로 브리핑을 여는 중에 수어통역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전에는 뉴스 화면 한 귀퉁이에 나오던 수어통역사가 이제는 중대 발표를 하는 정부책임자와 나란히 서서 발표 내용을 실시간으로 전해 준다. 농인들에게 더 정확하고 빠른 소식을 알리고자 온 힘을 다하는 통역사들의 모습은 수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인상적이다. 텔레비전(TV)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농인들은 내용을 몰라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야 국가가 자신들을 인정해 준다는 생각에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한다. 티브이 화면에서 수어통역이 차지하는 크기만큼 농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단다.

농인들의 알권리와 언어권 보장 차원에서 중대 사안에 대한 수어통역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공공 분야에 도입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농인의 고유 언어인 한국수어는 2016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됨으로써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고, 언어정책을 주관하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수어 사용자들을 위한 여러 정책 사업이 펼쳐지는 가운데, 지난해 12월부터 정부의 대국민 담화나 주요 정책, 재난 상황 발표 현장에 수어통역이 제공되게 됐다. 늦은 감이 있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 전달을 위해 이제라도 수어통역이 도입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어떤 사람들은 자막이 있는데 굳이 수어통역이 필요한지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수어한국어와는 구분되는 독립된 언어여서 한글 자막만으로는 농인들에게 쉽고 빠른 정보 전달이 불가능하다. 마치 우리가 해외여행을 할 때 영어 자료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 전 코로나 브리핑에 참여했던 수어통역사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티브이를 지켜본 지인이 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냐고 꾸짖고, 다른 이는 표정을 왜 그리 사납게 짓느냐며 환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주문하더란다. 둘 다 애정 어린 조언이지만 그가 마스크도 못 쓴 채 찌푸린 표정으로 통역을 한 데는 사정이 있다. 수어에서는 표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어는 손의 모양이나 움직임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까지 활용하는 언어다. 실제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비중을 따지자면 손짓은 30~40%에 불과하고, 나머지 60~70%는 표정이나 몸의 방향 등 다른 요소가 좌우한다. 같은 동작이라도 표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므로,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쓴 채 수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수어에서 표정은 음성언어에서 억양이나 말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밥 먹었어요라는 말을 할 때 끝부분을 올리는지에 따라 상대에게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의문문이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어에서는 밥 먹다라는 수어를 하면서 눈썹을 위로 치켜올려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의문문이 된다. “나 어땠어?”라는 질문에 잘했다는 수어를 할 때, 입을 다물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면 못하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되지만, 입을 하며 크게 벌리고 눈도 크게 떠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수어를 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굉장히 잘했다는 칭찬이 된다. 이처럼 수어에서 표정을 적절히 활용하면 부사어를 써서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심각한 감염병의 위험을 알리는 수어통역사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나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수어통역의 혜택은 당장은 농인들에게 돌아가지만 우리 사회 전체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가 차별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과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수어통역사의 찡그린 표정을 보더라도 더 나은 소통과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노력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